미리보는 시민역사관

새해 놀이판이 된 조선, 조선인 日出新聞朝鮮雙六 일출신문조선쌍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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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19

새해 놀이판이 된 조선, 조선인

日出新聞朝鮮雙六 일출신문조선쌍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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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 처음 맞이한 새해 1911년 1월 1일, 교토히노데신문(京都日出新聞)은 부록으로 일출신문조선쌍육(日出新聞朝鮮雙六)을 발행했다.(쌍육은 원래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로마제국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후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놀이방법은 말판이 되는 쌍육판과 말, 2개의 주사위를 가지고 일대일 또는 편을 나누어 승부를 가르는 놀이로, 지금의 보드게임과 유사하다.)
이 놀이는 장승으로 표현되는 ‘출발(ふりだし)’에서 시작하여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병합조칙’을 읽는 ‘오르기(上り)’에 도착하면 끝난다. 총 21장의 그림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뒷날 황실기예원(帝室技芸員, 제도 시행 이래 1944년까지 13차례 총 79명 임명)이 된 니시야마 스이쇼(西山翠 嶂), 기쿠치 케이게츠(菊池契月) 등 21명의 화가가 한 장면씩 나누어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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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상단의 신라의 ‘공선(貢船)’은 <일본서기>의 ‘신라가 왜에 조공선 80척을 보냈다’는 기사에서 연유한 그림이다.
고대로부터 한반도는 일본의 조공국이라는 뿌리깊은 식민사관을 보여준다. 한반도의 삼한, 즉 신라, 백제, 고구려는 번국(藩國)으로서 ‘천황’에 복속되어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허구에 지나지 않지만 이러한 내용은 일본 메이지 정부가 발행한 <사범학교일본역사> 「제15대 신공황후」라는 항목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공선(貢船)’과 나란히 붙어있는 오른쪽 그림은 임진왜란에서 거둔 일본(倭)의 전과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이총(耳塚)’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말고 죽이고 여자는 물론 갓 태어난 아이까지 남기지 말고 죽여서 그 코를 베라’고 지시했고, 왜군들은 전리품으로 벤 코를 소금에 절여 교토로 보냈다. 이렇게 모은 수만명의 코를 풍국신사(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신사) 앞에 묻고 귀무덤이라 칭했다. 코무덤(鼻塚)이 아니라 귀무덤이라고 칭한 것은 ‘코베기’가 너무 잔인하여 그 잔인성을 희석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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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그림에는 ‘긴 담뱃대(長煙管)’를 든 양반과 함께 우측에는 술에서 막 깨어난(初目醒 はつめざめ) 조선인의 모습이 보인다. 메이지 시대 전후로 신문의 삽화나 풍자만화, 니시키에(다색판화) 등을 통해 문명국이며 선진적인 일본과 야만적이며 뒤떨어진 조선을 대비하는 틀이 만들어졌다. 일본인은 제복과 제모, 그리고 근대적 장비를 갖춘 모습으로 등장하는 반면, 조선인들은 게으르고 나태하며 거의 헐벗은 모습이거나 유약한 모습이다. 특히 오른쪽 변발을 한 중국 복색의 등장인물에서는 중국과 조선의 민족성을 한꺼번에 비하하려는 저의가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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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그림 상단 중심에 보이는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병합조칙」을 읽는 「상행(上行)」에 말을 진행시키는 것이 놀이의 끝이다. ‘조선병합’은 그림 중앙에 나오는 ‘삼한정벌’의 신공황후(神功皇后), 오른쪽 관백수길(關白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 왼쪽 ‘춘묘공’(春畝公=이토 히로부미)으로 이어지는 당연한 귀결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고대사 왜곡 가운데 하나인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조선은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이래 일본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지배할 권리가 있다’라는 조선출병의 명분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에도시대에 이어, 메이지 시대에도 이러한 인식은 지속되어 정한론의 역사적 배경으로 작용했고, 조선의 ‘병합’을 통해 일본의 조선지배가 완성된 것으로 선전했다. 이러한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은 식민사학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이루었다.
한마디로 ‘일출신문조선쌍육’은 일본인에게 조선침략의 당위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세뇌하는 도구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대외팽창, 침략전쟁(조선강제병합, 만주침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전시생활 등)을 그림으로 묘사한 수많은 종류의 쌍육을 제작하여 일본 어린이들이 ‘놀이’를 통해 대외침략의 정당성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교육’하였다.
1911년 새해 첫날, 강제병합이 되자마자 한갓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한 조선과 조선인을 생각하면 씁쓸함과 분노만이 남게 된다. 잊지 말자! 역사를 잊으면 다시 누군가의 손에서 놀아나는 놀이판이 될지도 모른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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