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0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의 태화관에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고 통고한 다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자발적으로 체포당했다. 탑골공원에 모여 민족대표 33인을 기다리던 학생과 시민들은 그들의 체포 소식을 듣고 스스로 독립선언서를낭독하고 거리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번호에 소개할 자료는 바로 기미년 3월 1일에 낭독했던 독립선언서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는 왼쪽부터 세로쓰기로 내용을 서술하고 마지막에 ‘공약삼장(公約三章)’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을 나열하였다.
선언문은 최남선이 기초하였는데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와 인류 평등의 대의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평화적인 시위를 운동의 원칙으로 제기했다. 원래 한국의 독립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독립 ‘건의서’ 혹은 ‘청원서’의 형태로 발의되었으나 ‘민족자결’의 의미를 담아 독립 ‘선언서’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특히 선언서 마지막에 실린 ‘공약 3장’은 한용운이 작성했는데, 독립 선언의 의미와 방향 그리고 방법까지 일목요연하게 나열하여 독립선언서의 정수로 꼽힌다.
이 선언서를 토대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으며 동경, 길림, 용정, 미국, 하와이, 연해주, 대만, 상해 등 해외에서도 수십여 종의 또 다른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 현재 발견된 것은 20여 종 정도이다.
‘선언서’는 당시 보성사와 신문관에서 21,000여 매가 인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수량이 적어 매우 귀중한 역사적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보성사가 인쇄한 선언서(일명보성사판)는 첫줄에 ‘朝鮮(조선)’이 ‘鮮朝’로 잘못 인쇄되어 있고 활자체도 달라 ‘신문관판’과 구분이 가능하다. 연구소가 소장한 독립선언서도 보성사판이다. 이것은 현재 확인된 바로는 우리 연구소 외에 독립기념관, 서울역사박물관 등 기관과 독립운동가 오세창 가(家), 박종화 가에서 소장한 것까지 해서 약 7~8점만이 남아있다.
연구소는 지난 2010년 3·1절에 함경도 3·1운동 관련 일제 검찰자료와 함께 이 독립선언서를 공개했다.( 민족사랑 2010년 2월호 참조) 연구소가 소장한 독립선언서는 함흥지방법원 검사로 근무하던 이시카와 노부시게(石川信重)가 함경도 일대의 3·1운동 관련자들을 기소하기 위한 준비자료 안에 접힌 채 끼어 있었다. 선언서 뒷면에 “巡査拾得ノ紙(순사가 습득한 종이)”라는 글씨가 쓰여있다. 3월말 4월 초 함경도 지역 3·1만세운동 현장에서 일제 순사가 발견하여 검사에게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선언서가 2월 28일 아침부터 전국으로 배포되기 시작했는데 불과 보름 만에 전국적으로 신속하게 전파되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들불같이 일어난 3·1운동은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민족적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그 상징인 독립선언서는 내용에서나 영향력에서나 우리 독립운동사의 뚜렷한 분기점이 되는 자료이다. 그 의미를 살려 작년 12월 28일 국가기록원은 독립기념관에 소장중인 3·1운동 관련 독립선언서류 48점을 국가지정기록물로 선정했다.
서울시도 2월 17일 보도자료를 통해 개인이 소장한 독립선언서(보성사판)의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시는 2월 3일 문화재청에 등록 신청서를 제출한 상태다. 3·1독립선언서가 문화재로 등록되는 날이 머지않았다.
∷ 강동민 자료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