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1
조선신궁 도리이(鳥居) 앞에 서서
목도공립국민학교 학생들의 수학여행 기념사진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수학여행’ 기념사진이다.
수학여행은 근대 학교제도에서 발생한 개념으로 일본에서 시행되던 것이 19세기 말 근대학교의 설립과 함께 조선에도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수학여행은 동경사범학교 학생들이 지바현으로 ‘장도원족長途遠足’을 간 것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당시 수학여행은 행군의 변형된 형태로 견학 견문과는 거리가 먼, 신체 단련을 위한 도보여행에서 출발한 것으로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의 목표와 연결된 것이었다. 특히 1890년 교육칙어의 공포로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체제의 결속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교육지침이 각 학교로 하달되자, 수학여행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후 만한滿韓을 경영할 인재양성을 목표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 ‘수학여행’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기록된 사례는 <황성신문> 1901년 7월 26일에 실린 러시아의 만주수학여행 보도 기사이다. 이 자료로 미루어보아 이미 이 시기에 수학여행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수학여행은 조선인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한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등 철도의 개통에 따라 확대되었다. 수학여행을 간 학생들이 방문한 장소는 주로 근대시설, 자연경관 및 고적, 농업시설, 성지 등이었다. 인천항에 정박 중인 일본의 거대한 군함, 수원의 농림시험장, 함흥의 상품진열관, 전주의 잠업취체소, 춘천의 저수지, 경주의 고적, 금강산 등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승지라는 의미를 강조하여 대련 여순 평양 등지의 전투지역과 군 관련 기념품진열관 등을 탐방하였다.
수학여행 기간은 1일부터 21일에 걸쳐 다양하였는데 국내 수학여행은 최대 7일, 일본이나 만주로의 수학여행은 6일에서 21일에 걸친 장기간이었다.
1910년대 수학여행의 시대가 개막한 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학여행이 활성화된 것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통치방식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역사책과 지리부도만으로는 일본제국주의의 정신을 주입하는 작업이 한계에 다다르자 직접 체험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만주와 일본으로 수학여행이 확장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일제는 조선의 학생들에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위대한 역사’를 직접 확인하게 하고 수도인 동경의 위용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장거리 수학여행을 폐지하고 도보로 다닐수 있는 원족(소풍)을 실시할 것을 지시하였다. 신사참배 이외의 목적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또한 수학여행을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근로봉사와 성지참배를 중심으로 재편하는 계획을 세우고, 갱생부락 시찰, 신사참배 등 수행 지침을 내려 결국 황국신민화정책에 적극 이용하겠다는 뜻을 노골화하였다.
수학여행이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았으나 1940년 5월에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 학교의 수학여행을 제한하도록 하였으며, 가더라도 여행계획이 확립되고 확실한 감독 하에만 가능하도록 요건을 강화하였다. 또한 경비의 경감 문제로 인하여 경성, 금강산 등으로의 수학여행을 금지시킨 반면 조선신궁 참배 즉 황국신민화의 목적을 갖는 수학여행에 대해서는 오히려 기간을 늘이도록 권장하였다. ‘성역’ 이외의 지역은 절대로 피하고 기간도 최단기한에 그치며 역사와 문화에 빛나는 ‘황국정신’을 얻어가는 것을 교육상 최고의 효과로 내세웠던 것이다. 수학여행은 인솔자를 따라 정해진 순서와 장소를 방문하는 기획된 교육여행이다. 즉 수학여행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경험을 향유하기보다 교육당국과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수동적인 수용자의 입장에 설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신궁의 도리이 앞에서 사진을 찍은 조선의 학생들이 전부 ‘황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이 되었을리는 만무하다.
“나의 신민들은 마땅히 충효를 다하여 수많은 자가 한마음으로 대대로 아름다움을 이루어야 한다. 이는 우리 국체의 정화이며 교육의 연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 충의와 용기로 나라에 봉사하며 전지무궁의 황운(皇運)을 뒷받침해야 한다.”
– 일왕 메이지가 1890년 10월에 반포한 「교육에 관한 칙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