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3
이토를 찬양한 ‘매국배족’의 무리들
❶ 조중응의 이토 히로부미 송별시 정미칠적 중 하나인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취운정 시회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기 위하여 지은 시
❷ 취운아집翠雲雅集 취운정에서 창화했던 시를 모아 간행한 것으로, 시책인 <선린창화善隣唱和>제2집에 수록되어 있다.
❸ 경복궁후원원유회기념엽서 1909년 6월 15일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소네 아라스케에게 통감직을 넘겨주고 일본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이토가 일본으로 가기 전 7월 1일 경복궁 후원에서 열린 신구통감 송영회 기념엽서이다.
취운정翠雲亭. 종로구 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북촌길 고갯마루에 있던 정자다. 이곳은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이 내외정세를 토론한 장소로 유명하다. 특히 갑신정변 관련 혐의로 유폐된 유길준이 1887년 이후 이곳에 머물면서 1892년 11월 민영익의 주선으로 유폐가 풀릴 때까지 <서유견문>을 저술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일·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는 많은 지사들이 우국의 심정을 토로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나철, 이기, 오기호 등은 1909년 2월 나라가 파괴되고 백성이 망하는 근본 원인을 사대주의에 기운 교육으로 민족의식이 가려진 데 있음을 통감하고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했다. 독립을 꿈꾸던 이들이 비밀리에 이곳에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으며,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계획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1909년 7월 13일 오전 10시, 취운정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모임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전현직 통감과 각부 대신, 조선의 고위 관민들이 모인 시회詩會가 열린 것이다.
일본 메이지 정부는 7월 6일 각의에서 ‘한국병합방침’을 결정하였고, 7월 12일 대한제국은 사법과 감옥 사무를 일본정부에 위탁하는 약정서에 조인해 사법권마저 강탈당했다.
망국의 암운이 드리우고 있는 그때 7월 13일, 경성 한복판 취운정에서 조선의 고관, 유지들이 모여 한국 병합을 실질적으로 이끈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는 시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관료와 유지들은 앞다투어 이토를 추앙하고 여흥을 즐겼다. 이토 히로부미의 사위이자 정치가인 스에마츠 겐죠末松謙澄가 이 때 창화(唱和 : 시나 노래를 서로 주고받는 것)한 시들을 모아 ‘한일 양국의 선린우호 강화를 위하여’라는 미명아래 <취운아집翠雲雅集>이란 제목의 시집으로 엮었다.
이날 이토 히로부미에게 바쳐진 시 한 수. 정미7적 중 한 명으로 왜놈의 3대 충노忠奴로 꼽혔던 조중응의 시다.
春翁七十氣昻然 춘묘(春畝,이토 히로부미의 호)는 칠십 노인이면서도 기개가 높아
活佛身兼到上仙 살아있는 부처요 하늘에 오른 신선이라.
誰識平生勞苦意 평생 수고한 뜻을 누가 알리오
只憂西勢漸東邊 다만 근심하는 것은 서양의 세력이 동쪽으로 밀려옴이라.
時 隆熙三年 七月 於京城翠雲亭 賦別 伊藤公舜 一絶 書爲井上君雅囑
韓國從一品 農相 趙重應
융희 3년 7월, 경성의 취운정에서 이토공과 이별하며 절구 한수를 지었다. 이노우에군께서 부탁하셔서 썼다.
한국 종1품 농상 조중응
취운정에 모인 자들은 나라를 팔고 민족을 팔고 자신의 영혼까지 내맡겨 평생의 부귀를 얻었다. 일제강점 직후에 매국적들은 예외 없이 ‘조선귀족’으로 작위를 받고 거액의 은사공채로 부를 축적했으며 작위를 세습한 후손들도 대를 이어가며 각종 특권을 누렸다.
조선 병탄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불과 3개월 후인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심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