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부자(富者) 열전 – 민영휘, 김갑순,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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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富者) 열전 – 민영휘, 김갑순, 김연수

민족 수난 시대에도 ‘재벌’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1920년대 최대 현금부자는 이완용, 1930년대 최대 땅부자이자 재벌은 민영휘였다. 김성수도 1920~1930년대에 재벌 소리를 들었고, 1930년대에 신흥 현금부자로 최창학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1930년대 후반 1940년대에는 박흥식, 김연수,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 등도 갑부 소리를 들었다. 이외에도 공주갑부 김갑순, 영남갑부 문명기 등 지역별 갑부도 상당수 있었다. ‘재벌’, ‘갑부’, ‘최대 부자’로 불렸던 그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고,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일제에 협력했는지를 민영휘, 김갑순, 김연수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선 최대 갑부 민영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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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휘. <일한병합기념사진첩>(1911)

일제강점기에 명성황후의 친정 식구들 즉 여흥 민씨 가문은최대의 영화를 누렸다. 한말 고급관료를 지냈던 민영휘는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강점 이전부터 권력에 의한 수탈을 통해 토지를 집적하고 자본을 형성했다. 권력을 배경으로 한 축재였기 때문에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후 그 세력이 한풀 꺾여 1909년에 피해자들로부터 9건에 이르는 소송을 당했고, 그의 부정축재에 관한 기사는 신문에 계속 보도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은 상대측 변호사들을 회유하여 수임을 거부하게 하는 등의 악행을 서슴지 않는 것이었다.

민영휘(閔泳徽, 1852~1935)가 평안도관찰사를 지내던 시절, 어떤 이는 자기 아버지의 토지 20만 평을 빼앗기자 성인이 된 후 단신으로 민영휘의 집에 뛰어 들어가 육혈포로 위협하고 잃어버린 땅에 대한 돈을 받아낸 일화가 전해진다. 그 주인공인 이갑(李甲)은 그 돈으로 서북학회와 오성학교를 세우는데 일조했고, 잠시나마 대한제국 육군 장교였지만 을사조약 체결 후 군인 직을 사임하고 독립협회, 신민회 활동에 이어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민영휘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대신들의 처벌을 상소하기도 하였으나, 1907년 고종의 강제 양위를 상주하는 등 일제의 강제병합에 적극 협력하였다. 1910년 1월 일진회의 ‘합병성명서’에 찬성을 표명하고 지지 여론 확산을 위해 조직된 국민동지찬성회(國民同志贊成會)의 고문에 추대되었다. 같은해 3월 이완용과 조중응 등의 주도로 ‘합방’ 찬성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된 정우회(政友會)의 총재에 선출되었다. 6월에는 합병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직된 국민협성회(國民協成會)의 합병실행 추진단체인 한국평화협회 발기총회에 참석하고 찬성장에 선출되었다.

 

부정축재로 모으고, 친일협력으로 더욱 키워

강제병합 후에는 일제로부터 ‘조선귀족령’에 의거한 자작 작위와 함께 5만 원이라는 거액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병합의 공로 또한 인정받아 1912년에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한편 병합 전 축재한 자산을 기반으로 금융권에 진출해 한일은행장을 맡는 등 재계에서도 기업가로 입지를 구축했다. 일제의 각종 정책에 부응하며 미간지 개척, 토지 개량과 산미증식 등의 경제정책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재산 증식도 도모했다. 다른 한편으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주최한 가정박람회 명예고문을 맡거나 재단법인 휘문의숙을 설립하는 등의 정치사회적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이면서 일제 지배체제 유지에 협조했다.
<삼천리>1931년 1월호에는 조선최대재벌로 민영휘를 꼽으며, 나라가 어지러운중에도 어떠한 방법으로든 재산을 모은 민영휘의 치부 능력을 풍자하는 글이 실렸다.

[조선최대재벌해부(2), 민영휘씨계 1천만원, 사업체계=조선한일은행 조선제사회사 휘문고보 기타]
조선에서 첫재로 치는 부자가 누구이냐 하면 어른이나 아해이나 이구동성으로 민혜당(閔惠堂)이라고 똑-가티 대답을 한다. 그러면 이 민혜당이란 누구를 가리켜서 하는 말인가 하면 이는 민영휘 씨를 지칭하는 것 (중략)
한말 당시의 정계가 혼돈하얏슬 때에 이상과 가튼 관직을 가젓든 것으로 생각하야 축재의 맘이 잇섯다 할지라도 안연(晏然)히 축재를 할 여가가 업섯슬 것이다. 그러나 민씨는 재리에 선각자이엇든지 관직을 띄고서도 일면 축재에 조끔도 겨을으지 안코 각 방면으로 부력의 증대에 열중하엿섯다 한다. (중략)
씨가 재리에 눈이 밝은 만큼 지금에도 남모르게 뒤에 안저서 식리(殖利)를 한다는 말이 잇다. 어떠한 방면이든지 리(利]) 남을 것 가트면 뒤돈을 대여 준다 한다. 종로 상계라든지 대금업자라든지 어떠한 방면을 물론하고 씨와 관계를 매진 곳이 상당히 잇는 모양이다.

민영휘는 정실에 아들이 없어 민형식(閔衡植)을 양자로 입양했으나 이후 측실에서 민대식(閔大植), 민천식(閔天植), 민규식(閔奎植) 세 아들을 얻었다. 1935년 84세로 사망하였는데 신문에 짤막한 단신의 사망기사가 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1,200만 원의 엄청난 상속재산 때문에 형제의 난이 벌어져 각종 언론을 장식했다. 장자 민형식은 아버지 민영휘의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재에 아주 밝았던 민대식은 사후 아버지 재산 중 중요한 재산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이것이 민형식으로부터 큰 소송을 당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부의 대물림, 친일도 대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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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대식 민규식 민병도가 여러 차례 국방헌금을 낸 사실을 소개한 기사(<경성일보>1937.7.28)

서장자 민대식은 한말부터 직접 기업을 설립해 경영에 나서거나 여러 기업에 투자했다. 1920년 이후 아버지 민영휘를 이어 한일은행장으로 활동하면서 재계 거물로 부상했다. 삼남 민규식은 1912년 유학길에 올라 외국문물을 익히고 1920년 5월 귀국해 한일은행 상담역, 그리고 다시 한 달 후 상무이사로 취임하면서 경영 실무를 익혔다.
민영휘 사후 막대한 재산까지 상속받은 민대식과 민규식은 주로 토지 소유와 농업경영, 건물 임대 등의 부동산 투자로 부를 확대해 나가면서 여러 기업체도 경영했다. 특히 체계적 자산 관리를 위해 1933년과 1935년에 각기 설립한 가족회사인 영보합명회사와 계성주식회사는 10년이 못 되어 3~4배 성장했다. 이러한 확대 성장과 자본 축적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국책금융기관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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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대식, 민규식 등이 헌납한 애국경성 제2호기(기념엽서)

 

민대식은 ‘내선융화의 철저한 실행’을 강령으로 조직한 친일단체 동민회의 평의원으로 1924년부터 1929년까지 활동했다. 1935년 11월에는 일제가 사상범 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소도회의 이사로, 민규식과 함께 활동했다. 민규식 역시 1925년부터 1929년까지 동민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의 전쟁 동원과 임전체제 유지를 위해 외곽단체로 조직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이사·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이후에는 이를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이사로 일제 전시체제에 적극 협력했다. 아버지 민영휘의 대를 이어 친일한 결과 일제로부터 각종 경제적 특수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땅부자, 공주 갑부 김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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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순

김갑순(金甲淳, 金井甲淳, 1872~1960)은 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형을 잃었다. 부유한 집안도 아니었고 배움도 많지 않았지만 대한제국 말기에 지방관이 되면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1900년 충청북도 관찰부 주사로 임용된 다음해 왕실 소유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 봉세관(捧稅官, 충청남도)이 되었다. 1902년부터는 충청남도 부여군수, 해세위원 등도 겸직했다.
이후 1910년 강제병합 때까지 충청남도 공주, 강원도 김화, 충청남도 아산 등에서 군수를 지냈다. 이 시기에 이미 상당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부유하지 않았던 그가 재산을 모으는 주요 방편은 불법적이었다. 세금을 관리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들로부터는 더 많이 거둬 수탈하고 나라에 올려야 할 부분은 빼돌려 횡령했다.

 

탐관오리, 땅 투기로 갑부 반열에

당시 일제가 청일전쟁을 도모하며 철도건설을 계획한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대전과 유성 지역의 황무지를 20만평 가까이 사들였다. 구입 자금은 은행으로부터 저리로 융자를 받은 것이었다. 원래 공주를 경유하려 했던 경부선 철로는 공주 유림들의 반대에 부딪쳐 대전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결정되었다. 인근 토지를 사두었던 김갑순은 갑작스럽게 땅부자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탐관오리의 전형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최초의 ‘땅투기꾼 1호’라고 할 만 하다.
강제병합 후인 1911년 3월까지 충청남도 아산군수를 지냈다. 이후 공직에서는 물러났으나 지속적으로 관(官)과 줄을 대고 있으면서 공주지역 황무지 개간과 소택지 매립 및 수리사업 등을 통해 대지주로 성장해 나갔다. 특히 1921년 새로 개편된 중추원의 참의에 임명되면서 신분상승과 동시에 지속적인 축재의 기반을 확실히 했다.
일제 강점기 중추원은 조선 최고 권력자였던 총독의 자문기구로 합병 직후 설치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의 고위관료를 우대하여 이들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만들었지만 실질적인 역할은 미미했다. 하지만 1921년 사이토 총독이 친일파 육성정책의 일환으로 관제개편을 한 후 민간유력자 또는 지방 대표로까지 참여범위를 확대하여 민의를 대변하는 기구라는 인상을 강화했다. 실제적으로는 전국적 3․1운동으로 놀란 일제가 식민통치의 실효를 높이고 식민통치 선전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공식적인 업무는 1년에 1~2회 개최되는 중추원 회의가 전부였지만, 각 참의들의 거주 지역에서 개최되는 행정기관 및 공조직의 주요 회의와 행사에 빠짐없이 초청되는 등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또 지방행정기관과 총독부 고위관료와 면담도 가능하여 이권을 위한 로비나 지역민원 해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김갑순은 충남도청사를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시키기 위해 중추원 참의라는 지위를 충분히 활용했다. 1931년 충남도청사 예정지였던 대전의 시가지 땅 40% 즉 22만 여 평을 소유한 그는 대전으로 청사가 옮겨지자 수십 배가 오른 땅값으로 전국적인 갑부 반열에 올랐다.

 

지역민의 고혈까지 짜내

김갑순은 땅값이 급등한 자신 소유의 토지에서 조상 대대로 살거나 농사지으며 살던 사람들에게 5배의 대지(垈地) 사용료를 부과하여 지역민들의 분노를 크게 샀다. 지역민들은 자구책으로 대지료 납부를 거부하면서 버텼지만, 김갑순의 대응은 현재의 사채업자나 마찬가지인 신탁회사에 관리를 일괄 위임하고 체납하면 즉시 법적 처분 즉 지불명령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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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순이 대전읍 일대의 가옥 대지료(垈地料)를 5배 인상하여 200여 가구의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동아일보> 1932.6.4).

혼맥까지 활용한 집안 관리에도 철저했다. 장남 김종석(金鍾錫)은 조선총독부 판사를 지냈으며, 첫째 사위는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차장을 역임한 윤명선(尹明善)이다. 도지사를 지낸 이규완(李圭完), 중추원 찬의를 지낸 윤치오(尹致旿), 이완용(李完用)의 손자인 후작 이병길(李丙吉) 등 세력가들과 사돈을 맺어 당대 최고의 친일 혼맥을 구축하였다. 동시에 끊임없이 일제의 환심을 사고 신망을 얻기 위해 각종 공직과 친일단체에서 활동하고, 도로공사나 공립보통학교 증개축에 토지나 기부금을 헌납했다.
1930년대부터는 기득권유지와 재산보전을 위해 본격적으로 친일대열에 가담하였다. 일제 황민화운동의 첨병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및 평의원으로 참여했으며,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이사, 흥아보국단 충남위원 등 일제 말기 그는 충남의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활동하였다.

 

3. 전쟁특수에 힘입어 준재벌이 된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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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김연수(金秊洙, 1896~1979)는 호남 대지주 김경중(金暻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김성수(金性洙)는 1920~30년대 초 ‘재벌’ 소리를 들었고 동아일보를 창립했을 뿐만 아니라 경성방직 등 여러 기업의 창립과 운영에 관여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동생 김연수는 1921년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김성수가 이사, 박영효(朴泳孝)가 사장으로 있던 경성방직에 입사했고, 1922년부터 전무이사로서 경영을 맡았다. 이후 삼양사 설립을 비롯해 재계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1937년 만주에 진출하며 준재벌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민족기업 경성방직

민족기업을 표방한 경성방직은 본사를 남대문 인근에, 공장을 영등포에 두었다. 김연수가 1922년부터 이어받아 실질적인 운영을 해나갔다. 지금의 국민주 모집과 유사한 방식을 취하며 주식회사로 창립한 경성방직은 ‘태극성’이란 상표의 광목을 생산했다. 신문지면에 실린 그 광고에서는 “용감히 수입품을 당해내는 토산 광목”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일제가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자 농업 관련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하여 농사기업인 삼수사(三水社, 현 삼양그룹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이미 호남 대지주 집안이었지만, 산미증식계획에 호응해 농장 조성 및 간척사업 등에도 적극 나섰다. 김연수를 비롯한 당시 부호들은 일제의 정책방향을 예의 주시하고 그에 조응해 나가면서 총독부로부터 일정부분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성공시키고 재산을 늘렸다.
민족기업으로 시작했지만 자기 자본이 약했던 경성방직도 총독부의 각종 지원과 대출이 있어야만 지속적인 운영이 가능했다. 1930년대 세계 경제 불황으로 일본경제와 그와 연동된 조선경제도 극심한 불황에 직면했다.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으로 그 활로를 모색했고, 일본기업들도 경쟁적으로 만주로 진출했다. 김연수 역시 일제 식민지배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며 광활한 만주시장 진출을 도모했다.

 

전쟁협력기업 경성방직

1937년 중일전쟁은 김연수에게 본격적인 만주 진출과 함께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었다. 군수용 면직물 수요가 늘고 만주로의 수출이 증가하자 경성방직은 대규모 증자를 통해 생산설비를 확대했다. 1940년대에는 만주국 펑톈에 3천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남만방적주식회사를 세웠다. 더 나아가 만주토지건물개발회사, 만몽제지, 만몽모직주식회사, 대련기계제작소, 남만주가스주식회사에 투자하는 등 준재벌로 성장했다. 대규모의 농장도 만주 각지에 설립해 경영하였다.

 

27 경성방직이 국방헌금과 사회사업에 회사 수익의 절반인 51만원이란 거금을 냈다. <매일신보> 1938.10.16.

김연수가 이렇게 승승장구했던 이유는일제에 물심양면으로 협력했기 때문이다. 1937년부터 일본 육해군과 본인이 간부로 있던 각종 관변 단체에 헌납한 국방헌금 합계가 무려 80여 만 원 이상이었다. 1937년부터 각종 전쟁협력단체에서 직책을 맡고 거금의 국방헌금을 내서인지 1939년 경성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최대의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1940~1944년 이사로, 1942년 11월부터 후생부장으로 활동했다. 1941년 민간 최대의 전쟁협력기구로 만들어진 조선임전보국단의 준비위원·발기인·상무이사를 역임하였다.
젊은이들을 전쟁에 내모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1939년 경성부육군병지원자후원회 이사로 활동한 것에 이어 1943년 ‘선배격려단’의 일원으로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조선인유학생들에게 학병지원을 독려하는 한편, 징병제·지원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다. 1941년 5월부터 해방될 때까지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로 있으며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고 협력하도록 하는 등 총독부의 주구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0년대에 들어 일제는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8~16세의 소녀들을 근로정신대, 국민징용 등의 명목으로 끌고 갔다. 국내 징용의 경우 절대다수가 방직공장으로 갔는데, 경성방직도 그 혜택을 받았다. 지방에서 트럭에 태워진 어린 소녀들은 군인의 군복 천을 만들기 위해 방직기계 앞에 앉아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일해야만 했다. 또 열악한 작업 환경은 미성년의 아이들을 더욱 위험에 노출시켜 다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기도 했다. 참다못해 도망친 아이들은 붙잡히면 모진 구타를 당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특수를 누린 경성방직의 이면이었다.

 

4. 역사적폐의 원조 친일 청산의 길

이상 살펴본 세 명의 일제강점기 ‘부자’는 태생이 금수저든 흙수저든, 한때 민족의 미래를 걱정했든 아니든 각자 가진 재산을 유지하고 더 불리기 위해 권력을 적극 활용했다. 국권을 빼앗긴 시절에 그 권력은 식민지 통치자인 일제로부터 나왔다. 권력이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기 위해 일제에 적극 협조해 갔으며, 다른 한편으론 자기 동포들의 고혈까지 짜내어 자신의 재산을 늘려나갔다. 이들과 다른 ‘부자’들도 있었다. 국권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집안의 자산 모두를 처분해 신흥무관학교 건립에 쏟아 부은 이회영 일가, 재리에 밝았던 능력을 활용해 백산상회를 차리고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했던 안희제가 그들이다. 민족의 수난시대에 부(富)란 누군가에게는 목적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단지 수단일 뿐이었다. 국권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그 둘의 차이는 분명해졌고, 조선 민중이 전쟁에 내몰리는 순간에는 더욱 확연해졌다.
1945년 해방이라는 또 다른 ‘한 시대’를 맞이했을 때, 이회영 선생과 안희제 선생은 타지에서 이미 순국해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해방 후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친일파는 어느 샌가 민족자본가, 견실한 기업가, 존경받는 교육자로 대접 받았다. 특히 1995년 이완용 후손이 제기한 ‘조상 땅 찾기’ 소송에서 ‘친일파의 재산권도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법원 판결에 따라 20억 원의 땅을 찾아간 후 민영휘, 김갑순을 비롯한 많은 친일파 후손들도 소송에 나섰다.
당시 엄청난 국민적 공분이 일었고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에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이제라도 국가의 이름으로 친일청산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10여년 후에야 관련 법률과 함께 대통령 직속의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국가차원의 친일청산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 환수 작업이 쉽지 않았다. 제3자에게 명의가 넘어갔거나 법인소유로 바뀐 경우는 환수 대상이 아니었다. 조선 최대 갑부 민영휘 후손의 남이섬이 대표적이다. 대전, 유성 지역의 온천개발에도 관여했던 김갑순의 송덕비가 대전의 온천공원 내에 있는데, ‘전 중추원 참의’라고 버젓이 기재되어 있다. 김연수의 경성방직 공장 자리에 들어선 영등포 타임스퀘어에는 등록문화재 ‘경성방직 옛 사무동’ 건물이 남아있고, 그 안내판에는 “경성방직〔지금의 ㈜경방〕은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유일한 공장이었기에 의미가 남다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난 2016년 촛불정국에서 가장 뜨거웠던 이슈 중 하나가 역사적폐 청산이었던 것은 그간 정권 차원의 역사왜곡에 대해 응축된 분노가 박근혜정권의 국정교과서 강행으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진실을 은폐하고 정권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갉아 먹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더 나아가 부와 권력에 역사가 농락되지 않도록 역사를 직시하고 역사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저버리고 일제에 충성한 이들의 친일행적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우리 주변에 버젓이 남아 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것, 잘못된 기록은 바로잡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이명숙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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