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으로

분노 없이 어찌 용서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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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 살다5] 우리 현대사를 옭아매고 있는 역사의 밧줄을 끊어라

밧줄 끊기

우리가 일렬 횡대일 때 당신은 겁이 난다.

우리가 오합지졸 각각의 이력을 고수할수록 당신은 겁이 난다.

겁이 난 당신을 향해 일렬인 우리가 돌을 든다.

당신은 쓰러지고, 우리는 멍하게 서서

뒤늦게 깨닫는다. 허공이 흔들리고,
당신이 아무것도 아님, 당신이 허깨비였음을.

허깨비에 의해 그토록 구체적으로 참견당했던
우리의 삶, 꼭 한 번 사는 삶을 향해,
횡대인 우리가 치를 떤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82 김정란 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에서)

“5억 돌파! 물방울이 바위를 뚫었다.”

지난 19일 <오마이뉴스> 톱기사의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드디어 해냈구나! 마침내 우리 현대사에 깃든 어둠을 몰아낼 역사의 새벽이 밝아오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코끝이 찡해지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그 기사를 보고 감격스러웠을 사람이 어디 나뿐이었겠는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한 성금모금 운동이 처음 시작된 지난 8일, 작은 돈이나마 나도 1만원을 보태면서도 삼일절까지 1억원을 모금하겠다는 목표가 쉽게 달성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5억이라는 목표액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그런데 불과 하루 만에 5천만원을 넘기고 채 나흘도 안 되어 1억원을 돌파하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니 나는 거의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이제 거의 물 건너 간 것이 아닌가 여겼던 일제 청산의 의지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토록이나 뜨겁게 자리 잡고 있었던 말인가!

그러나 그 이후 사흘 만에 다시 3억원을 돌파하고 그로부터 다시 사흘 반 만에 5억원을 가볍게 넘어서는 정말 믿지 못할 감동의 드라마를 지켜보면서 나는 네티즌들의 이 뜨거운 동참의 열기가 단순한 의지의 차원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친일인명사전 예산 삭감을 결정한 국회 예결소위의 박종근 의원이 접수한 성금을 되돌려 줄 것을 요청한 많은 네티즌들의 단호한 목소리나 행자부의 모금 중단 요구 공문 이후 오히려 더 가속화된 네티즌들의 성금 동참에서 나는 단순한 의지가 아니라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읽은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분노였다. 지나간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분노였으며,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하여 법과 질서와 사회의 안녕을 내세운 무리들에 대한 분노였다. 우리의 현대사를 꽁꽁 얽어매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밧줄, 아니 보이지만 애써 외면하려고만 했던 역사의 밧줄에 대한 분노였다. 그 밧줄에 지금도 손발이 묶여 있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분노였다.

보기 드문 이 네티즌들의 분노의 폭발은 이를테면, 사이버 공간에서의 촛불 집회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대사건인데도, 일부 언론들은 일언반구의 보도조차 없다. 이는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밧줄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체제순응적인 것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아울러 돌을 들고 일렬횡대로 선 네티즌들의 이 분노의 폭발에 그들이 얼마나 놀라고 겁이 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놀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겁먹은 모습으로 침묵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일렬횡대가 되어 함께 일어설 때 생기는 그 놀라운 힘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뒤늦게 깨닫는다. 그들이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허깨비였음을, 그동안 그 허깨비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그토록 구체적으로 참견당해 왔음을.

이 뒤늦은 깨달음 앞에서 횡대인 우리는 치를 떤다. 그러나 그 분노는 보복이나 심판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대사를 옭아매고 있는 부끄러운 역사의 밧줄을 끊어내려는 것이며 그를 통해 그 밧줄에 매달렸던 그들을 역사의 이름 앞에 다시 세우고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분노 없이 어찌 용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옭매인 밧줄이 답답하다고 불평만 해서야 어찌 밧줄을 끊을 수 있겠는가. 네티즌들의 분노의 폭발로 모여진 5억원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성금이 수 십 억원의 예산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004/01/23 오전 8:29ⓒ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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