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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연구소 소사 · 15, 진정한 지도자의 덕목- 열정과 청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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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월 15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에서 개최한 ‘친일문인과 그들의 작품’ 전에서 조문기 이사장이 당시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게 <친일문학론>을 선물하고 있다.

삼일절과 광복절은 물론이고 연구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이 몇 개 더 있습니다. 임종국 선생의 기일인 11월 12일과 부민관 폭파 의거일인 7월 24일입니다. 연구소가 해마다 부민관 폭파 의거 기념식을 열고 있는 데는 역시 의거의 주역인 조문기선생이 연구소 2대 이사장을 역임하신 인연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조문기 선생의 항일정신보다는 인간적인 면모에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조문기 선생이 1999년 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할 당시 연세는 74세였습니다. 취임 후 오랫동안 자택인 수원시 천천동에서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연구소가 있는 서울 청량리까지 꼬박 2시간, 왕복으로 하면 4시간인 거리를 선생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시어 상근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또 독립운동가분들과의 약속을 일부러 연구소 사무실에서 잡아 자연스럽게 그분들이 연구소를 후원하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조문기 선생의 곁에는 늘 유종하 차영조 두 분이 동행하셨습니다. 유종하 차영조 두 분은 모두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평소 조문기 선생을 존경해 비서를 자처하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분들에게는 좌영조 우종하라는 별칭도 붙었습니다.(안타깝게도 유종하 선생은 작년 9월 9일 별세하셨습니다.)
조문기 선생은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적어도 30분 정도 일찍 약속 장소 부근에 머무르다 정각에 약속 장소로 가십니다. 이에 대해 당신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면서 몸에 밴 탓이라고 합니다. 일제 당시에 생긴 긴장을 평생 안고 사시는 것 같아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기도 했습니다.
2004년 3월 1일 연구소 충남지부가 독립기념관에서 삼일절 행사를 진행할 때의 일입니다. 수원에서 다른 분 승용차를 얻어 타고 독립기념관에 온 조문기 선생의 모습을 보고 천안의 회원들이무척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노인원 회원이 기꺼이 1,500만원을 보내와 처음으로 공용차량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마련한 법인차량(카니발)은 연구소 각종 행사에 요긴하게 쓰였음은 물론 조문기 선생의 나들이에도 가끔씩 사용되었습니다. 한번은 사모님께서 집안일에 한차례 사용할 수 없을까하고 말씀을 꺼내셨다가 선생께 핀잔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공사 구분에 엄격한 선생의 일면이지만 그래도 독
립운동가의 집안일을 돕는 것도 공적인 일이라고 조문기 선생을 설득하여 한두 차례 허락을 받았던 기억도 납니다.
조문기 선생은 특별한 운동이나 취미가 없으셨는데 장수를 위해 운동을 권유 드리면 어김없이 이런 말이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늙은이가 사회에 별 도움도 안되면서 오래만 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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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기념관 공사 현장에서 열린 건립 저지 집회에 참석한 조문기 선생

이러한 선생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인 김학철(1916~2001) 선생의 유서가 떠오릅니다.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독립운동 폄하가 일상화한 지금이지만 지배층의 사익집단화와 만연한 부정부패를 보면서 다시 조문기 선생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치열하면서도 청빈했던 삶을 떠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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