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전 친일파·6
조선귀족 편(2)
을사오적의 후손들, 친일과 항일로 갈라서다
이용창 편찬실장·책임연구원
지난 호 이 글 말미에 자작 박부양(박제순의 습작자)의 장남 박승경이 학병에 지원한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차남의 독립운동 투신도 살짝 언급했다. 내친 김에 두 차례에 걸쳐 박제순-박부양의 친일행적과 후손 박승유의 독립운동 관련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999년 8월 14일자 <강원일보>에 「을사오적 손자 자괴감, 일본군 탈출 독립운동」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소개되었다. 내용의 일부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 외무대신(외부대신-필자)이었던 박제순(1858∼1916)의 친손자인 박승유(1924∼1990·전 ○○대 ○○과 교수-○은 필자) 선생이 할아버지의 친일행동을 속죄하기 위해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사실이 새롭게 밝혀져 유족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박 선생은 서울법대 전신인 경성법학전문대를 졸업한 1944년 10월 일본군에 징집돼 중국 저장성 의오현에 주둔중인 횡정부대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 선생은 할아버지가 나라를 일본에 넘겼다는 주변사람들의 이야기에 심한 자괴감을 느끼고 가문을 대신해 속죄하기 위해 일본군에 징집된 지 한 달 만에 함흥에서 탈출, 광복군에 들어가 활동했다.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한 이후 박 선생은 중국무석과 무호 난징 등을 순회하며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는 한편 대일 선전공작활동을 벌였다. 또 경기중학교 시절부터 익힌 특출한 음악실력을 발휘해 최초로 독립군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면서 항일의지를 고취시켰다.”
요약하자면 외부대신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조부의 매국행위를 속죄하기 위해 손자가 독립운동에 헌신해 건국훈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에 따르면 박승유는 1944년 10월 일본군을 탈출,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 활동한 공적으로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다(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승격).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조선귀족의 후예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것은 박승유가, 현직 조선귀족으로는 민태곤이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민태곤(1917∼1944)은 남작 민종묵-민철훈-민규현으로 이어진 작위를 승계해 1934년 12월 10대 중반의 나이로 남작에 올랐다. 민태곤은 조선귀족 신분으로 도호쿠(東北)제국대학 재학 중이던 1941년 12월 ‘민족주의그룹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송치된 후 1942년 11월 기소유예로 풀려난 행적으로 서훈이 추서(2009년 애족장)되었으므로 신분상의 차이는 있다.
박승유의 미망인은 “남편은 할아버지의 친일행각에 대해 차라리 자결하지 왜 살아남아 후손들에게 고통을 주느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며 “죽는 날까지 일본군탈출기를 쓰며 괴로워 했다”고 밝혔다고 한다(<강원일보>)
박승유는 조부 박제순, 부친 박부양의 어떤 친일행적에 자괴감을 느끼고 이를 속죄하기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했을까? 과연 박승유는 조부 박제순과 부친 박부양의 친일행적을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을까? 박제순과 박부양은 2009년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지만, 같은 해 말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결정한 1006명의 반민족행위자로도 확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친일반민족행위 결정> Ⅳ-6(박부양), Ⅳ-7(박제순)에 수록되었다. 박승유는 1990년에 사망했으므로 상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부친 박부양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몰랐을 것이다.
이제 <친일인명사전>의 내용을 중심으로 몇 가지 사실들을 보완해 박제순-박부양 부자의 친일행적과 가계를 추적해 보자.
박제순(1858∼1916)은 철종의 부마 금릉위 박영효의 가문인 반남박씨 집안으로 1910년 10월 일제의 작위 수여 당시 모두 4명이 작위를 받았다. 후작 박영효(습작자 박찬범), 자작 박제순, 남작 박제빈(습작자 박서양)과 박기양(습작자 박승원-박정서)이다. 족보상 촌수는 좀 더 자세한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박제순 사망을 알리는 부고에 ‘친족대표’로 박영효·박제빈·박기양이 이름을 올린 것으로 보면 조선귀족으로 이들의 관계는 남달랐을 것이다.
<매일신보> 1916.6.22.4면 ; <경성일보> 1916.6.21(조간).4면.
박제순은 1916년 6월 20일 자택인 경성부 화동(지금의 종로구 화동)에서 59세로 사망했다.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는 위독 상태, 추모·추도 기사가 연일 이어졌고 장례가 치러졌다는 기사도 소개될만큼 박제순의 친일의 ‘공’은 화려했다. 1894년 7월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재직 중 동학농민군 진압작전에 참여했는데 당시 불려졌던 “새야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박으로 너를 치자”라는 가사 중 ‘박’은 박제순이었다. 화려한 관직과 함께 일제와의 관계에도 ‘공’을 세워 1901년 11월 일본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05년 11월 외부대신으로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勸助)와 ‘을사조약’을 체결해 ‘을사5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곧바로 의정부 참정대신에 올랐다가 ‘을사5적’ 암살을
피해 1907년 5월에 사퇴했고, 1910년 6월 내각 총리대신(이완용) 서리로 경찰권 이양 각서체결, 8월에는 내부대신으로 ‘합병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회의에서 가결에 동조함으로써 ‘경술국적’으로도 지탄을 받았다. 이를테면 매국노 2관왕에 오른 것이다. ‘강제병합’과 함께 그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6년여 동안 매년 1600원, 자작 작위와 함께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은사공채의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으로 연 5푼[分]의 이자가 매년 3월과 9월에 지급되었다. 이 또한 세습되는 것이니까 1945년 해방까지 박부양 등 습작자들이 계속 이어 받았다. 1910년대 10만 원은 현재의 시가로는 15∼20억에 달하는 거금이다. 당시 10만 원의 5% 이자는 5,000원, 현시세로는 최대 1억 원의 이자를 매년 받은
것이다.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 대례식에 참석한 후 <경학원잡지>(1915.12)에 정4위 훈1등 경학원 대제학 명의로 “하늘을 바라보고 성인을 우러르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립니다.”라는 「즉위 대례식 헌송문」을 일왕에게 지어 바쳤다. 사망 후 일왕의 특지로 종3위에 서위되었으며, <신한민보>(1916.7.27)는 「매국적 제순이 죽어, 생전의 산 갓흔 죄를 지고」에서 생전의 매국 행위를 비난했다.
박제순의 작위는 「조선귀족령」(황실령 제14호, 1910.8.29)에 의거해 1916년 9월에 아들인 박부양이 승계했다. 박부양은 외아들로 추정되는데 족보와 제적부를 확인할 수 없으니 몇 가지 문헌을 토대로 그의 가계를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밖에 없다.
<경성일보> 1916.10.8(석간).1면. 박부양 외 이충세(남작 이근명은 6월 11일 사망), 남장희(남작 남정철은 6월 30일 사망), 민철훈(남작 민종묵은 7월 20일 사망)도 같은 날 습작 및 습작사령서를 전달받았다.
<조선신사보감>(1913), <조선신사대동보>(1923) 등에는 박제순의 부친이 참정을 지낸 박홍수라고 나온다. 자작 조중응이 박제순의 사망을 애도하며쓴 「청렴, 근신, 염담(恬淡)」(<매일신보>, 1916.6. 21.3면)에 ‘가족은 13세의 아들과 부인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박부양은 1905년 6월 서울에서 태
어났다. 박제순이 사망할 당시에는 11∼12세가 된다. 일왕이 궁내성을 통해 정식으로 습작을 명한 것이 9월 30일, 습작사령서를 전달받은 것이 10월 6일(매일신보) 또는 7일(경성일보)인데 이 습작사령에 기록된 나이는 12세였다. 한편 <매일신보> 1921년 5월 10일자 3면에 「박부양씨 정우(丁憂)」라는 제목으로 “자작 고 박제순 씨의 미망인 박부양 씨 대부인 정경부인 대구서씨는 숙환으로 지난 7일 오후 2
시 25분에 서거하였는바 발인은 5월 13일 오전 5시 장지는 부천군이라더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같은 지면 광고란에는 대구서씨의 부고도 함께 실렸다.
<매일신보> 1921.5.10.3면. 장지인 부천군 소래면은 박제순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대구서씨는 박제순과 함께 1915년 11월에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조중응이 말한 “13세의 아들과 부인”은 바로 박부양과 대구서씨가 분명하다. 박제순의 부고와 부인 대구서씨의 부고를 비교해 보면 박부양은 두 사람 사이의 외아들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두 개의 부고에 기록된 사자(嗣子)가 다르다. 박제순의 부고에는 “암이(巖伊)”, 대구서씨의 부고에는 “박부양”이라고 하였다. ‘사자’라 함은 대를 이을 아들, 적자(嫡子), 상속자 등을 일컫는 것이고, 특히 작위를 계승하려면 호주를 이어받은 상속자라야 일제가 이를 인정했기 때문에 다른 인물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1916년 박제순 사망 당시 ‘암이’가 1921년 대구서씨가 사망하기까지 5년여 사이에 사망했다면 사자가 박부양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장자가 사망하면 차자나 서자, 이마저도 없으면 입양자 등이 이어 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박제순이 1916년 6월에 사망하고 3개월 후인 9월 30일 습작에 이어 10월 초에 사령서를 받은 것은 분명 박부양이었기 때문에 3개월 사이에 사자가 바뀔 가능성은 없다. 결국 ‘암이’는 박부양의 어렸을 적 이름이었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추정할만한 또 하나의 근거는 박부양은 박제순이 사망한 1916년에 11∼12세의 미성년이었다는 점이다. 부고 당시에는 호주가 되기 전이어서 ‘암이’라는 어렸을 적 이름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 직후 박부양으로 호주를 상속해 작위를 계승했을 것이다. 장남 박승경이 1922년생, 둘째 박승유가 1924년생이니 박부양은 두 살 연상인 부인과 20세 이전에 두 아들을 낳았다.
1943년 11월 이름도 음습하고 의뭉스러운 ‘제국비밀탐정사(帝國祕密探偵社)’라는 곳에서 발간한 <대중인사록>의 「박부양」항목에 유일하게 그의 ‘가정’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의 판권에 의하면 1925년 12월 제1판이 발행된 후 계속 인물이 추가되어 「박부양」 항목은 1943년에 제14판의 ‘조선편’에 실렸다. 내용은 이렇다.
“종4위. 자작. 중추원 서기관. 경성부 서소문정 서소문병원 내. 경성부(박)제순 장남. 명치 38년(1905년) 6월 7일생. 경성 보통과 고등고교학교 졸업(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오류-필자). 총독부 촉탁. 내무국 지방과 근무를 거쳐 소화 16년(1941년) 11월 현직. 취미 독서.【 가정】 처 성숙(性淑, 명치 36년:
1903년), 장남 승경(勝敬, 대정 11년: 1922년) 경복중(학교) 졸업, 2남 승우(勝祐, 대정 13년, 1924년: 勝裕의 오류-필자) 경기중(학교) 졸업”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가계도를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가계는 문헌상으로 추정한 것일 뿐이어서 족보·제적부 등의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제보를 기다린다. 다만 온라인 <위키백과>의 박제순과 박부양 관련 ‘가족관계’는 매우 잘못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제순(朴齊純)과 박제순(朴齊恂)은 반남박씨로 본관은 같지만 서로 다른 인물이다. 박제순(朴齊恂)의 장남은 박이양(朴彛陽, 1858∼1925), 2남은 박희양(朴熙陽, 1867∼1932)이다. 2남 박희양의 아들은 일제시기 검사·판사를 지낸 역시 동명이인의 박승유(朴勝維. 본명 박기문. 1903∼1950)다. 또한 박이양의 사위는 일제시기 중추원 참의를 지낸 조경하(趙鏡夏·靑橋鏡夏, 1888∼1941)다. 박이양 형과 사위 조경하, 박희양(동생)은 모두 중추원 참의를, 박승유는 검사·판사를 지낸 인물로 4명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러면 박제순의 습작자인 박부양의 친일과 박부양의 차남인 박승유의 항일, 그 엇갈린 행보를 본격 추적해 보자.
* 다음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