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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16, 내선일체 유적으로 둔갑한 행주산성, 황국신민화의 도구로 전락한 문화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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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16

내선일체 유적으로 둔갑한 행주산성, 황국신민화의 도구로 전락한 문화재들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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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매표소 앞에 자리한 ‘사적 제56호’ 표지석. 이곳은 의당 행주대첩지로 인식되지만, 최초의 고적지정은 뜻밖에도 일제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드러난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들어서다 보면 매표소 바로 옆에 ‘사적(史蹟) 제56호’라고 새긴 표지석이 설치된 것이 눈에 띈다. 등록문화재로서는 지정번호가 꽤나 빠른 편에 속하는데, 관련 목록을 찾아보니 지정일자가 1963년 1월 21일로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 번호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때 종래의 지정문화재들을 일괄 재분류하면서 생겨난 결과물이고, 최초의 문화재 지정이 이
뤄진 것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총독부관보> 1939년 10월 18일자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총독부 고시 제857호를 통해 행주산성은 ‘고적 제88호’로 지정되었고 바로 그 뒤를 이어 남한산성(南漢山城)이 ‘고적 제89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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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관계 및 임나관계 등 이른바 ‘내선일체’ 관련유적에 대한 고적지정이 결정된 제4회 보존회 총회의 결과를 알리는 <매일신보> 1938년 12월 1일자 기사

행주산성이건 남한산성이건 간에 이것들을 문화유산의 범주에 포함하여 고적(古蹟)의 반열에 올려놓은 주체가 바로 조선총독부였다는 사실은 자못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행주산성이라고 하면 임진왜란 때의 행주대첩이란 말이 먼저 연상이 되는 공간이고, 바꾸어 말하면 왜군들의 입장에서는 패전지이자 치욕의 장소인 것이 분명하니까 하는 얘기이다. 그런데도 일제가 구태여 이곳을 고적으로까지 지정하여 보호하려 했던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8년 12월 1일자에 수록된 「보물, 고적을 통해 내선융화(內鮮融和)를 강화, 빛나는 신지정(新指定) 24점」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단서를 찾아낼수 있다.

지난 25일 총독부에서 열렸던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朝鮮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會) 제4회 총회는 오노(大野) 정무총감을 회장으로 하고…… 권위 있는 각 위원 27명이 출석하여 신중한 심사를 한 결과 작년보다 약 30점을 더하여 전부 101점을 보물, 고적으로 지정하였는데 이 중에 24점은 내선일체를 규명하는 데 있어 두 번 다시 얻기 어려운 사적(史蹟)이라 하여 만장일치의 추천으로 영구히 총독부의 손에 의하여 보존하기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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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정초를 맞아 미나미 총독이 쓴 ‘내선일체’ 휘호

그런데 이와 같이 내선일체의 귀중한 사실을 웅변으로 말하는 고적과 보물을 찾아내기까지에는 총독부당국의 적지 않은 노력이 숨어 있었다. 내선일체를 조선통치의 근본방침으로 하는 미나미(南) 총독은 역사상으로 내선일체의 사실을 말하는 백제(百濟), 임나(任那) 등의 고적과 보물을 적극적으로 조사 보호하도록 오노 총감과 시오바라(鹽原) 학무국장에게 명하였으므로 이 뜻을 좇아 사회교육과에서는 김(金) 과장이 직접 지휘자가 되어 부하직원들을 내선일체의 사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경남, 전남, 충남의 각도로 파견하여 상세한 실지조사를 하여 보존회에 그 심사를 의뢰한 결과 전기와 같이 내선일체의 귀중한 고적으로 지정을 보게 된 것이다. ……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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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선일체의 발상지로서 부여신궁의 창립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8년 11월 18일자 기사. 일제는 이곳을 국체명징(國體明徵)과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신도(神都)로 삼으려 했다.

이 당시 보존회 총회에서 새로 고적 지정이 결의된 내역에는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상징하는 백제 및 임나와 관련된 유적들이 망라되었다. 행주산성의 경우 문록경장역(文祿慶長役; 임진왜란)과 관계된 것이라는 표시가 선정사유로 추가되긴 했지만, 이곳이 우선 백제시대의 유적으로 분류됨에 따라 이 목록의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밖에 김해 김수로왕릉을 비롯하여 창녕 화왕산성, 함안 성산산성, 김해 삼산리고분, 고령 지산동고분군, 창녕 고분군 등 가야지역에 속한 유적들도 임나의 흔적으로 치부되어 일괄하여 고적지정 후보지로 선정되었다.

제4회 총회(1938년 11월)에서 지정 결의된 내선일체 관련 유적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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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내선일체는 1936년 8월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종래의 ‘내선융화’라는 통치기 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를 새로운 식민통치의 근본방침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특히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전시체제가 확산되자 이에 대응하여 식민지 조선에 대해 전쟁협력의 강요와 더불어 조선인의 역사와 정신을 말살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동조동근(同祖同根)이니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동심일가(同心一家)니 선만일여(鮮滿一如)니 하는
따위는 모두 내선일체와 궤를 같이하는 대표적인 구호였다. 또한 1938년 11월에 백제의 옛 도읍지 부여를 내선일체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이곳에 부여신궁(扶餘神宮)을 세우기로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진 결정이었다. 이와 더불어 일제의 관변사학자들에 의해 주창된 이른바 ‘임나(任那; 미마나)’의 존재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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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창원 봉림사 절터에서 옮겨진 진경대사탑비의 모습. 이 비석은 동강 난 채 수습되었지만, 비문에 ‘임나’가 포함된 탓에 지체없이 복원되어 전시유물로 활용되었다.

일찍이 조선총독부는 1919년 3월에 경남 창원에 있는 봉림사(鳳林寺) 터에서 여러 토막으로 동강난
채 흩어져 있던 진경대사탑비(眞鏡大師塔碑)를 수습하여 총독부박물관(경복궁)으로 옮겨간 일이 있
었다. 그런데 여느 비편(碑片)과는 달리 이것만은 곧장 파손부위를 재접합하여 전시유물로 활용하였다.
재빨리 이렇게 처리한 이유는 바로 비문에 “대사의휘는 심희요, 속성은 신김씨이고, 그 선조가 임나왕
족이니(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 ……”라는 구절이 들어 있었던 탓이었는데, 일제가 임나
의 존재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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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고적보존회가 제작 배포한 엽서(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미나미 총독의 글씨로 새긴 ‘임나대가야성지비’(왼쪽)와 ‘츠키노이키나순절지비’(오른쪽)의 모습이 담겨있다. 대가야성지비는 ‘임나’를 포함한 글씨 일부가 깎인 채 1986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고, 이키나비 역시 현재 비문이 완전히 갈린 채 고령 현지에 남아 있다.

여기에서 나아가 조선총독부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서술된 임나 관련 내용을 역사적 기록으로 기
정사실화하여 이와 관련한 기념물의 제작에도 열을 올렸다. 1939년 6월에 미나미 총독의 글씨를 받아 제막한 ‘임나대가야국성지비(任那大加耶國城址碑)’와 ‘츠키노이키나순절지비(調伊企儺殉節址碑)’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들 비석의 제작 동기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10월 23일자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수록되어 있다.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내 보통학교 운동장은 옛날 임나국의 일본부(日本府)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 고령읍내를 감도는 회천(會川)은 신라왕의 군세에 ‘츠키노이키나’ 3부자(父子)가 유린을 하다 못하고 결국 참수(斬首)되어 장렬한 죽음을 한 고적인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소학교, 보통학교의 국정교과서에까지 편입되어 널리 아동에게 충신의열의 표본으로 그의 도를 가르치고 있는 바이나 표본으로 그 역사적이 엄연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사실도 지금에는 단순히 일부 전문가의 지식밖에는 되지 못하여 팻말 하나 박혀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히 대구부(大邱府)로서도 하등의 대중적 시설을 보지 못하여 여간 유감 되게 생각지 않던 중 마츠모토(松本) 내무부장이 지난 번 경주를 시찰할 때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어 …… 고적보존의 취지하에 이 ‘이키나’의 터와 임나(任那)의 고적에 팻말을 박고 대구역(大邱驛)의 명소안내에도 게재할 것을 간담요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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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선일체의 상징으로서 조선총독부에 의해 건립된 두 비석의 제막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9년 6월 21일자 기사

이에 앞서 경남 김해에서는 1934년 4월에 “임나 이래의 고적유물을 영구히 보존하고 널리 사회에 소개함을 목적”으로 하여 김해고적보존회(金海古蹟保存會)가 결성되었고, 경북 고령에서도 지산동 고분의 발굴조사를 계기로 1938년에 고령고적보존회(高靈古蹟保存會)를 설립하여 이를 임나의 유적으로 널리 선전하였다. 또한 일제는 1935년 9월 1일을 고적애호일(古蹟愛護日)로 정한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각 지역의 고적유물에 대한 정화활동을 펼치게 하는 한편 이를 통해 내선일체의 정신함양과 시국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계기로 삼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지역에는 대개 일본의 색채를 더욱 가미하기위해 벚나무와 단풍나무를 대량으로 식재하는 일
도 잦았다. 가령 고양 벽제관과 같은 곳이 대표적 사례였고, 행주산성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
로 <매일신보> 1941년 4월 11일자에는 그해 ‘기념식수일’을 맞이하여 고적지로 유명한 이곳에 탐승객의 발길을 더욱 빈번하게 하고자 고양군의 주관으로 사쿠라나무 1천 주를 새로 심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 행주산성을 거닐다가 혹여 벚꽃길을 만난다면, 그것이 내선일체의 광풍이 남겨놓은 생채기가 아닌지 한번쯤 의심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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