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청산이 ‘386’들의 ‘피의 노래’라고? | ||||||||||||
서울대 송호근교수의 중앙일보 기고문 “386 세대 ‘칼의 노래'”를 읽고 | ||||||||||||
제목은 “386세대 ‘칼의노래’”고 내용은 최근 150여명의 여야 의원이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제출하면서 부각된 친일청산에 대한 비판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친일청산의 분위기를 마치 현 정부가 주도하는 것으로 단정해서 날카로운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럴 듯하고 고상한 문학적 수사 뒤엔 섬찢한 선동이 가득하다.
첫 문장이 “386 정권이 탄생할 때 마음을 다잡지 않아서인지 386이 부르는 ‘칼의노래’가 자못 서늘하다”로 시작된다. ‘386 정권’? 이 정권을 ‘386정권’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한가. 정권의 실세에 386 세대가 많이 포진된 것을 두고 하는 말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나라가 그들에 의해서만 끌려가고 있는가. 맘에 안드는 386의 역할을 과장하려다보니 나라를 이끌고 있는 많은 계층, 세력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나는 386세대와 친일청산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왜 느닷없이 386세대가 ‘칼의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의 현 정부, 그리고 386세대에 대한 반감이 그를 이렇게 ‘오바’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곳곳에서 그의 반감이 드러난다. “칼의 노래”, “집권층의 ‘한서림’”, “피의 노래”, “가위눌리는 듯한 느낌”, “친일의 목” 등등, 사용하는 언어들이 .자극적이다. 그리고 악의적이다. 마치 현 ‘집권층’이 과거사 청산을 무슨 한풀이 삼아 하는 듯이, 그리고 피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글을 쓰고 있다. 옳은 글쓰기가 결단코 아니며, 분명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다. 과거사 청산의 분위기는 사실 최초의 민간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김영삼 정부 때부터 조금씩 고조되어 왔다. 불행히도 이승만 정권뒤에 친일의 혐의가 있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군부독재가 계속 되었다. 그런 서슬퍼런 상황에서 친일과거사 청산을 누가 입 밖에 낼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다가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쳐 현 정부에 이르러 비로소 사회적인 분위기가 성숙되어 가능해진 것이다. 10여년 동안의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민간단체의 힘겨운 노력이 오늘을 가능케 한 것이며, 현 정부 들어서 ‘386 세대’가 느닷없이 ‘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진상 ‘규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겨우 ‘규명’하자는 것이 어떻게 ‘피의 노래’라는 말인가. 그리고 “너무 늦었다“니. 그러면 너무 늦었고 멀리 있다고 청산하지 말고 그대로 덮고 가자는 것인가. 그것이 사회학자로서 할 소리인가. “…증조부가 생래적 친일파였음을 국가가 확인한들 그 수치를 어찌 감당하고 속죄하며 살 것인가?”- 이게 누구의 얘기인가? 송교수는 친일파의 자손인가, 아니면 친일파들이 수치 속에 살아갈 것이 안쓰러워 보다못해 변호하고 나선 것인가? 그들의 죄가 어떤 죄인가. 식민지 시절 나라와 민족을 팔아 호의호식한 죄다. 그런 민족반역범죄에 시효가 있는가. 관대하게 대할 죄가 따로 있는 것이다. 나는 송교수에게 묻고 싶다. 해방된 지 반세기 넘은 후에 진행된 프랑스의 ‘모리스 파퐁’ 재판을 아는가고. 나치 점령 하에 독일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나이 90 먹은 파퐁을 프랑스 국민들은 가차없이 법정에 세웠다. 프랑스인이 괜히 문화민족이라며 콧대가 높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프랑스와 우리나라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일반 국민의 역사의식 수준 차이이다. 프랑스는 반세기도 넘어 전의 반민족행위를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일반 국민의 역사의식이 올라가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역사의식이 프랑스 일반 국민의 수준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의 의식수준이 이 정도라는 것이 그저 슬플뿐이다. 송교수는 “거물급 친일인사들도 초기에는 민족운동에 헌신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공이 있으니 과를 덮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러면 강도짓을 한 사람을 과거에 사회복지 사업에 헌신했다는 이유로 죄를 덮어줘야 하는가.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얘기할 것이다. “그때 태어났으면 너도 별 수없이 친일할 수 밖에 없었을거다”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안 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어떤 이유에서든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고 친일했다면 그 죄과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나도 송교수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역사 두려운 줄 알아야 하고, 그렇게 역사가 엄히 단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나일지라도. 그래야 후일 이 나라가 다시 불행한 시절이 닥치더라도 그런 무리들이 나타나지 않게 된다. 송교수가 주장하고자 하는 소위 ‘공과론’ 또는 ‘상황론’은 친일한 자들과 그 후손들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송교수같은 지식인이 동조를 하니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친일판정은 학문적 과제이기에 정치가 끼어들면 난처해 진다.” 이제 논리가 점점 궁색해진다. 친일판정을 정치가 한다는 것이 아니다. 충분치는 않지만 어느 정도 민간의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연구를 계속하면서 판정은 학계에서 하면 된다. 다만, 그 장을 정치권에서 만들어 주는 것 뿐이다. 아무도 친일판정에 정치가 개입한다고 하지 않았다. 송교수의 역사적 사실왜곡과 견강부회는 뒤로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 그는 말한다. “더욱이 36년의 일제 강점기는 불과 5년 남짓한 나치 프랑스와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국내 인사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총독부의 감시대상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나치 치하는 4년 남짓이라고 말해야 옳다) 무슨 고려대상이 그렇게도 많은가. 총독부의 감시대상이었다는 것도 반민족행위에 대한 참작사항이라면 고려되지 못할 사항이 무엇 있으며, 무슨 죄는 단죄할 수 있으랴. “독립군의 승전보를 한줄이라도 실으려 천황찬양을 머리기사로 올렸을지도 모른다.” 독립군의 승전보를 실으려 천황찬양 기사를 머리기사로 올렸다고? 사실왜곡의 진수를 송교수가 보여주려는 모양이다. 이쯤에서는 신문을 집어던지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내가 과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조선’ ‘동아’에 1933년 이후 독립군의 승전보가 실렸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젠 ‘조선’, ‘동아’도 주장하지 않는 말을 대신 할 정도로 송교수는 ‘조선’ ‘동아’에 대한 터무니없는 옹호로 일관하고 있다. 다음의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41년 일본어로 신문을 발행하라는 총독부의 최후통첩 앞에서 ‘조선’과 ‘동아’는 5년의 친일행보를 마감해야 했다. 자결, 즉 자진폐간을 선택한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글을 어떻게 신문시평에 담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왜곡도 대단한 왜곡이다. ‘조선’과 ‘동아’는 총독부의 최후통첩 앞에서 장렬히 자결한 게 아니라, 돈을 받고 폐간에 합의해준 것이다. 이는 조선일보의 폐간사(1940. 8. 10일자)에도 분명히 나와 있다. “조선일보는 신문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지나사변(중일전쟁) 발발 이래 본보는 보도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엿고 더욱히 동아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데 만의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한 것은 사회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무슨 말인가. ‘국책’이라 함은 ‘일본의 정책’을 말한다. 조선일보의 나라는 일본이었던 것이다. 즉, 보도를 통해 보국(일본에게 보은함)하려했고 일본이 신동아 질서를 건설하는데 협력코자 했으며, 이제 나라(일본)의 방침에 순응하여 폐간에 응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결’인가? 송교수는 조선일보가 마치 비장한 최후를 맞은 듯이 말하지만,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일보가 ‘자결’하면서 돈을 얼마를 받았는지 아는가. 총독부로부터 80만원, 매일신보로부터 20만원, 모두 100만원을 받았다. 당시 가미가제 전투기 한대값이 10만원이었으니 100만원이라는 돈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돈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조선일보의 총자산이 57만원정도였으며 사옥은 준공 당시 32만 3천원 정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사옥을 넘겨준 것도 아니고, 그저 신문발행 안하는 대가로 받은 돈이 100만원이니, 방씨로서는 (폐간으로 다른 자산을 다 넘겨주었다 하더라도) 25만원어치의 자산을 손해보고 4배 장사를 한 것이었다. 송교수, 아시겠는가. 이렇게 곡학(曲學)하면 곤란하다. 송교수가 이 글을 쓰면서 사실관계를 상당히 소홀히 한 것처럼 보인다. 군데군데 오류가 눈에 띈다. 우선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뗀 것은 동아일보가 아니라,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이며 ‘조선’은 ‘5년’ 친일을 한 것이 아니라 ‘8년’ 친일을 하였다. 그리고 16년간 연명했던 민족지가 아니라 약 ‘10년’ 정도이다. 사실관계를 분명히 알고 글을 쓰기 바란다. 우리는 ‘조선’ ‘동아’가 전 생애에 걸쳐 반민족행위를 저질렀다고 하지 않는다. 특히 친일상인들의 모임인 ‘다이쇼 실업친목회’가 창간하였으나, 그후 월남 이상재 선생이 재직시 민족주의적 역할을 한 적도 있다. 분명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삼는 기간은 ‘조선’의 경우 현 사주인 방응모가 ‘조선’을 인수하고 난 1933년 이후의 일이다. 호도하지 말라. 이에 대해서도 초창기에 민족지 역할을 했으니 후반기의 반민족행위를 눈감아 달라고 할 셈인가. 참으로 이런 글을 접하며 매번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너무나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중앙일간지에 나오는 기고니 시평이니 하는 글들이 한결같이 퇴행적이라 정말 걱정이다. 이런 글들을 읽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테니 이런 신문, 이런 지식인을 두고 우리나라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단 말인가. 지식인의 사회적 폐해, 요즘 신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을 친다. 아, 신문개혁, 그리고 ‘교수 개혁’ (이런 말도 있는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논설위원 * 필자는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시지부장입니다. [중앙 시평] 386세대 ‘칼의 노래'(송호근 서울대 사회학, 중앙일보 2004. 7. 30) 386 정권이 탄생할 때 마음을 다잡지 않아서인지 386이 부르는 ‘칼의 노래’가 자못 서늘하다. 이 삼복더위에 간담이 서늘하다면 좋으련만 어딘지 논리의 이음매를 끊고 말문을 막으려는 듯 밀려오는 게 편치 않다. 집권층이 기득권이라고 말할 때 새어 나오는 한 서림이 역사 정통성을 틀어쥐었다는 승전가로 울려지고, 날선 칼 끝이 겨냥하는 게 상처투성이의 근현대사여서 더욱 그렇다. 동학혁명으로 시작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막을 내린 우리의 20세기, 그러나 어쨌든 변방에서 탈출한 세계 유일의 경력과 고충을 고스란히 품은 현대사를 눈물겹게 관조하는 노래가 아니라 시비를 가려 목을 베는 ‘피의 노래’인 듯해서 그렇다. 조선시대 최고의 형벌은 사체 시해였다. “남은 선택은 망명.자살.친일뿐” 동학 희생자의 명예 회복과 친일을 규명한다는 데 누가 감히 반대논리를 설파할 수 있으랴? 그럼에도 가위눌리는 듯한 느낌은 왜일까? 우선 한껏 구부러진 역사를 펴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 대상은 너무 멀리 있다. 1894년 우금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고조부를 찾아낸들 ‘가문의 영광’외에 더 무엇이 있으며, 증조부가 생래적 친일파였음을 국가가 확인한들 그 수치를 어찌 감당하고 속죄하며 살 것인가? 판.검사는 물론 면장.소위.형사 직위로 친일 범위를 넓힌다면 일제 하 모든 조선인 관료가 심판대에 오른다. 그들에게 혐의를 씌우기 전에 서슬 퍼렇던 일제통치에서 그나마 조선인을 위한 협소한 공적 공간이 어떻게 트였던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개별 경력의 종합 판정 문제다. 거물급 친일 인사들도 초기에는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 회장을 맡았던 윤치호는 1912년 ‘105인 사건’으로 발목이 잡혔고,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최린과 조선의 문호 이광수는 20년대 중반에 변절했다. 창씨개명으로 ‘속앓이하는’ 서민보다 이들의 죄는 중차대하다. 언론.교육.산업에 매진했던 김성수는 37년 중.일전쟁 이후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49년 반민특위의 김성수 재판은 민족운동을 위한 공(功)과 친일의 과(過)가 서로 상쇄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천도교의 거물 최린은 반민특위 재판정에서 침통하게 답했다. 무단통치 하에서 남은 선택지는 망명.자살.친일이었다고. 이들에 비하면 치어(穉魚)에 불과한 일본군 소위 박정희는 해방 직후인 45년 8월 말 광복군에 합류했다. 당시 광복군 중위였던 장준하로부터 통렬한 비판을 들으면서 군복을 갈아입었다. 박정희의 원죄는 오히려 민주투사들을 지옥으로 보낸 데 있다. 친일 판정은 학문적 과제이기에 정치가 끼어들면 난처해진다. 더욱이 36년의 일제 강점기는 불과 5년 남짓한 나치 치하 프랑스와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국내 인사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총독부의 감시대상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무단통치로 악명을 떨친 미나미 총독 하에서 동아일보는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떼냈다. 그런데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일환으로 일어 전용과 창씨개명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신문사에 남겨진 선택지는 무엇이었을까? 독립군의 승전보를 한 줄이라도 실으려고 천황 찬양을 머리기사로 올렸을지 모른다. 아니면 거꾸로 일 수도 있다. 41년 일본어로 신문을 발행하라는 총독부의 최후통첩 앞에서 ‘조선’과 ‘동아’는 5년의 친일 행보를 마감해야 했다. 자결, 즉 자진 폐간을 선택한 것이다. ‘5년의 친일’을 부각하면 16년간 연명했던 민족지의 고난은 영원히 사장된다. 친일 판정, 정치 개입하면 곤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일제의 폭압적 통치를 별도로 두고 개인과 기관의 경력을 토막내어 단죄하는 것은 역사를 공멸의 늪으로 끌고 간다. 386의 ‘칼의 노래’는 역사의 상처를 위무하는 진혼곡인가? 독립군의 딸과 독재자의 딸이 삿대질하며 끝장을 보자는 게 그들의 선조가 진정 원했던 것인가? 민주투쟁 20년의 경력으로, 순도 100%의 보증서를 품에 안고 스스로 정의로워 비장해진 표정으로 이순신의 마지막 바다 노량에 친일의 목을 한없이 수장시킨들 역사가 순정품으로 표백될 것인가? 돌을 던지려면 지극히 신중해야 한다. 역사의 한 귀퉁이를 보수(補修)하려는 정치도 결국은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환기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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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족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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