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을 하루 앞둔 지난 2월 28일, 연천 전곡리 38선 기념탑 앞에서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을 되새겨보는 조촐하지만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부축을 받아야 거동할 수 있는 고령의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함께 어우러진 예사롭지 않은 이 날 행사는, 일제말기 징병으로 끌려갔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소련군에 포로가 된 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4년 가까이 강제노역에 혹사당하다 불귀의 객이 된 희생자들과 귀환 도중 3.8선에서 남한 경비대의 총격으로 사망한 원혼을 달래는 60년만의 위령제였다.
침묵을 강요당했던 굴절된 역사의 이면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이 날 행사도 언론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조용히 진행되었다. 오히려 NHK의 다큐멘터리 특집 제작팀과 동양통신 기자가 동행 취재하여 일본 쪽의 높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유족들과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베리아 억류 생환자 8명은 일제의 침략전쟁과 시베리아의 강제노역으로 죽어간 동지들에게 60년 만에 첫 술잔을 올렸다. 다리가 불편해 혼자 걷지도 못하는 몸을 이끌고 참석한 생존자들은 “이제라도 이런 자리가 마련되어 여한이 없다”며 고마움을 표시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
시베리아 억류 희생자들은 그 흔한 추모위령 시설조차 없어, 1949년 2월 생환자들이 38선을 넘어 온 지점 가운데 하나를 택해 위령제를 가지게 됐다. 한국시베리아삭풍회 이병주 회장은 추모사에서 “한국 정부가 우리들의 호소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였다면, 이런 길가에 서서 분단의 상처를 담은 38선 기념탑 앞에서 동지들을 위로하겠느냐”며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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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억류피해자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알려온 김효순 한겨레신문 대기자(연구소 지도위원)도 이날 참석해 “일제 식민지배가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의 상처와 분단의 고통이 이토록 오래 지속되었겠는가를 생각게 하는 이 장소에서, 아흔을 앞두고 있는 생존자들이 살아계실 때 정의가 바로서고위로가 될 수 있도록 여기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드리자”는 말로 추모사를 대신했다.
이날 위령제에는 일본인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3명도 참석했다. 일본 시베리아입법추진회의 대표인 이케다고우이치(池田幸一)씨는 “뒤늦게나마 이렇게 위령제가 열린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전쟁 피해와 전후보상에 대해 한마디 사과도 없는 일본 정부를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시베리아의 삭풍을 견뎌낸 우리들이 살아생전에 진실이 밝혀지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좋은 소식을 안고 다시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지도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0여 년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정부 등을 대상으로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는 전후보상 청구소송을 지원해 왔는데,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모임인 ‘한국시베리아삭풍회’ 회원들을 원고로 하는 소송도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를 경유하여 지원하고 있다. 2003년 6월 12일 한국인 군인ㆍ군속 생존자와 유족 164명을 대표해, 고령의 피해자 2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시베리아 억류기간 중 받지 못한 미불임금의 반환과 손해배상 등 17억 5천여만 엔을 청구하는 소송을 일본 동경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2006년 1심에서 패소했으나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